최원대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사유할 수 없다. 사유하지 못하는 세계는 곧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과도 맥을 같이 한다. 결국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자신을 이해하며 타인과 연결되는 ‘사유의 공간’이자 ‘존재의 기반’이라는 뜻이다.
이 철학적인 문장을 가장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서툰 외국어로 자기소개를 해보면 된다. 어휘가 부족하면 간단한 자기소개조차 힘들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로 인해 겪게 되는 가장 큰 불편은 소통이다.
‘소통’이라 하면 보통 타인과의 관계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나 자신과의 소통이 우선이다. 내 감정은 어떤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듣고, 이해하는 과정이 없으면 타인과의 대화도 힘들다. 내가 나를 모르고, 나 자신과 친하지 않은데 세상 누구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래서 소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대상은 나 자신이다. 그 다음이 타인, 나아가 세상과의 소통으로 이어진다.
언어는 단순히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이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다. 자기 탐색을 깊이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어휘고, 어휘가 부족하면 사유의 깊이도 얕아진다. 단순히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정밀하고 정확하게 자신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붙잡아 단어로 이름 붙이는 능력이 중요하다.
‘짜증나’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들어 있다. 불편함, 답답함, 걱정, 미안함, 외로움, 서운함, 슬픔 등. 이를 명확하게 분리해서 인식한 다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더 깊은 관계를 맺고, 더 넓은 세계를 품는다.
나탈리 민의 동화 『글자를 모으는 소년』은 깊은 숲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혼자 살아가던 소년을 통해 언어와 소통에 대한 성찰을 전한다. 마을에서 수집한 글자들이 몸을 들썩이며 춤추고, 노래 부르고, 구석으로 미끄러지거나, 매달리기도 한다는 비유는 탁월하다.
주인공이 글자를 수집한다는 이야기가 보여주듯, 단어 하나하나는 생각의 씨앗이고 관계의 문이다. 단어를 모은다는 건 곧 나를 알아가는 일이자 동시에 세계를 받아들이는 준비다.
진짜 소통은 말을 잘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말하기 전 멈춤이 더 중요하다. 잠시 멈춰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단어를 고르고, 상대를 기다릴 줄 아는 태도야 말로 진정한 소통이다.
『글자를 모으는 소년』처럼 우리 모두는 평생 동안 단어를 수집해야 한다. 내가 수집한 단어만큼 세상과의 접점은 더 넓어질 것이다. 글자를 모은다는 건, 결국 나를 확장해나가는 일이다. 내가 어떤 말을 쓸 수 있는지가 곧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어휘는 곧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