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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대의 글로사니즘] 가난이라는 럭셔리 상품 - 가난을 흉내내는 부자들
  • 기사등록 2025-06-02 17: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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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가 최근 한정판으로 출시한 신발이 화제다. 이름하여 파리 스니커즈(Paris Sneakers). 그런데 이 제품의 모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명품 신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찢기고 해지고 누렇게 변색된 모습으로, 얼핏 보면 전쟁터에서 주워온 듯하다. 실제로 발렌시아가는 이 제품을 “아주 낡고, 흠집 있으며 더러운 상태로 제공된다”고 설명했다.


가격은 더 충격적이다. 같은 디자인의 멀쩡한 버전은 80만 원대인데, 오히려 다 망가진 제품이 3배나 비싸다. 1,850달러로 현재 환율로 약 250만 원에 달한다. 심지어 페트병을 납작 구겨 끈 하나 달아서 만든 슬리퍼는 121만 원이다.


 

발렌시아가는 “패스트패션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자는 취지”로 이 제품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한 번 산 신발을 평생 신자’는 메시지로, 낡은 외형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발렌시아가는 과거에도 이케아 비닐 가방을 연상케 하는 쇼핑백을 270만 원에, 종이 쇼핑백 모양의 소가죽 가방을 140만 원에 판매하며 ‘소비문화에 대한 도발’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해 왔다.


프랑스 패션지 GQ 편집장은 이 제품을 두고 “럭셔리의 본질을 완전히 뒤집는 시도”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사회적 풍자, 패션계의 반(反) 엘리트적 선언이라는 해석도 있다. ‘가난해 보이지만 비싼’ 디자인을 통해 패션의 규범을 조롱하고, 소비사회의 아이러니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오래 신자는 철학’이라곤 하나 그 뒷맛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누군가는 정말로 경제적 여유가 없어 낡은 신발을 오래 신을 수밖에 없다. 그런 가난한 삶을 흉내 낸 제품이 수백만 원에 거래된다는 사실은 아무리 ‘미적 감식안’이라 포장하려 해도 가난의 미학화이자 희화화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낡고 더러운 것을 멋으로 소비할 수 있는 계층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자들이다. 운동화 한 켤레에 200만 원이 넘어도, 심지어 그것이 더러운 상태라 할지라도 재미로 소비할 여력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가난하진 않지만, 잠시 가난해 보이기 위한 소비라니. 패션의 규범에 대한 조롱이라 하기엔 그 대상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환경 운동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발렌시아가는 일부 제품에 ‘재활용 캔버스’, ‘업사이클링’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러나 전체 생산 및 유통 구조, 고가 책정 방식 등을 고려할 때 이러한 설명은 환경을 이용한 마케팅 전략에 불과하다. 이른바 그린워싱(greenwashing), 환경보호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는 제품임에도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내세우는 행위인 것이다.

 

결국 이런 제품들은 패션을 넘어 사회 계층 간 소비의 경계를 더 확고히 드러내는 상징이 된다. ‘나는 이 낡은 신발이 멋지다는 것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라는 자기표현, ‘남들과 다른 미학을 소비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라는 과시적 기능이 그 이면에 자리한다.


예술의 자유와 실험정신을 억압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누군가의 지난한 현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돈 주고 흉내 내는 스타일이 된다는 사실. 이 아이러니한 풍경은 우리에게 어떠한 질문을 던지는가.


가난을 상품으로 만드는 행위는 과연 예술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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