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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책방-최원대] 관계의 조건
  • 기사등록 2025-06-04 11:4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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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즐겨 찾던 동화책을 어른의 시선으로 다시 읽고, 해석한 뒤 메시지를 나눕니다. 감정, 공감, 소통, 배려, 관계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로 삶의 핵심 가치를 돌아보고, 자신만의 칼럼으로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누구게?”

거실에서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꼬마 아이 뒤로 다른 아이가 몰래 다가간다. 눈을 가리고는 ‘누구게’하고 묻는다. 앉아있던 아이는 당연히 알 수 없다. 애초에 둘은 아는 사이가 아니니까. 처음 보는 사이다.

그 이후 행동이 흥미롭다. ‘모리모토 소라’라고 자기를 소개하더니, “놀랐어?”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이내 서로 안녕하고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리고는 인형놀이 하자며 거리낌없이 다가선다. 금새 친구가 된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성인들과 달리 아이들의 관계에는 별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상대의 이름을 몰라도 괜찮고, 나이도, 사는 곳도 중요하지 않다. “누구게?” 한마디면 충분하다.

성인이 되면서는 분별력이 생긴다. 서로 구별지어 가르는 능력이다. 세상 물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때 필요하나 한편으로 분별은 서로를 경계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경계심은 본능에 가깝다.


그래서 우린 선뜻 먼저 말을 걸기를 망설이고, 거리감이 사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판단하고, 때로는 비교하는 사이에 오히려 가까워지기 어려워진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의 관계 맺기는 훨씬 더 순수하고, 본능적이다.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식.


구도 노리코의 그림책 『빵공장이 들썩들썩』도 그런 아이들의 순수함을 표현하고 있다. 말썽꾸러기 고양이들이 빵 공장에 침입해 온갖 사고를 치지만 악의를 갖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세상이 그저 재미있고, 눈앞의 모든 것들이 궁금할 뿐. 오히려 그런 말썽을 통해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함께 웃게 된다.

누군가는 밀가루 범벅이 되고, 누군가는 발자국을 남기며 빵 공장을 ‘들썩들썩’하게 만들지만,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고양이들끼리의 유대감은 점점 깊어진다. 함께 무언가를 하며 생긴 기억, 실수했을 때의 눈빛, 웃음소리, 그런 것들이 관계를 만든다.


아이들의 세계도, 고양이들의 세계도 관계 맺기는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서로를 완벽히 아는 게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마음의 자세다.

 때로는 의도치 않은 실수가 오히려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넘어졌을 때 먼저 손을 내미는 건 늘 또래 친구들이고, 잘못했을 때 가장 먼저 용서해주는 것도 또래 친구들이다. 관계란 그렇게 조금씩 ‘틈’을 내주는 일이다.


내 계획이 아닌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내 시간을 나누는 것, 내 공간을 함께 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정해둔 기준을 조금 내려놓는 것이다. 이름을 모르더라도, 아직은 낯설더라도, “인형놀이 할래?” 한마디로 시작할 수 있는 관계가 얼마나 귀한지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어른에겐 아이들보다 높은 벽이 존재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쌓은 벽이다. 하지만 그 벽을 가볍게 넘나드는 고양이들처럼, 아이들은 관계 앞에서 훨씬 더 유연하고 자유롭다. 『빵공장이 들썩들썩』은 그래서 단순한 그림책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관계 맺기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관계는 “누구게?”라는 장난스러운 질문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 한마디가 누군가의 세상에 들어서는 첫 문장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옳은 말’이 아니라, ‘말을 걸 용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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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6-04 11:4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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